소리를 따라 걷는 나의 친구에게작가 지상진안녕, 너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진다. 활동지원가의 도움을 받아 지방 소도시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해, 근로 지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고 있겠지. 그 와중에도 라디오에서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하기 위해 독서를 즐기고 있을 테고. 직접 쓴 대본을 외워 녹음에 임하는 네가 자랑스럽다. 열다섯에 받았던 시각장애 등급도, 스물다섯에 들어간 첫 직장도, 서른다섯에 맡게 된 라디오 고정 코너도, 겪어보기 전까진 상상조차 못 했었지. 지금부터 10년 후, 마흔다섯의 너를 그려볼 수 있겠니? 요즘의 나는 일상이 사뭇 만족스러워.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겨준 네 덕분이야. 여전히 세상에는 신기술이 쏟아지고 있어. 네가 살던 때, 인공지능이 카메라에 비친 대상을 실시간으로 설명해 주기 시작했잖아? 이제는 체력만 된다면 인공지능 기술만으로 시각장애인이 혼자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도 있어. 누구 얘기냐고? 누구겠어. 쇄골이 부러져도, 느릴지언정 끝까지 달리는 너였을 나겠지. 그저 나 자신만의 호흡으로 달려보고 싶었다. 정보 접근성 격차를 줄이겠다는 거창한 목표였다면 오히려 완주하기 벅찼을 거야. 물론 인공지능이 종종 아는 척하며 거짓말을 해서 애를 먹기도 했지. 하지만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면, 그 아버지는 도전 아니겠니? 지금껏 오래달리기라는 취미로 인내하는 자세를 배워왔기도 하고. 네가 가이드 끈을 놓지 않는 한, 나도 마라톤을 끝까지 놓지 않을 거야. 가이드 러너를 해주던 친구와 여전히 함께일지 궁금하려나? 각자의 호흡으로 달렸기에 우리는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었어. 요즘도 최고의 러닝메이트야. 하나의 목표를 이루고 나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게 마련이지. 어느 순간부터는 기술을 잘 다루지 못해 소외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어. 흰 지팡이로 겨우 도착했는데 키오스크밖에 없는 가게를 상상해 봐. 기술 앞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의 마음을 장애인만큼 잘 이해할 사람이 또 있을까? 한편, 장애인이 기술을 활용한다면 삶의 질을 넓힐 공간도 커지겠지. 손이 없어도 글을 쓸 수 있고, 들리지 않아도 대화할 수 있으니까. 지금 나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신기술을 각자의 특성에 맞게 활용하도록 돕고 있어. 사람들은 그걸 ‘테크 코디네이터’라고 부른단다. 이건 비단 장애인만을 위한 일이 아니야. 비장애인들도 새로운 기술을 몰라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아왔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어. 그런 뿌듯함 속에서 공부를 이어가는 중이야. 네가 라디오에서 책을 소개하듯,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길을 읽어주고 있는 셈이지. 네가 보면 이상한 커리어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내게는 더없이 지당한 소임이야. 우리는 10년을 사이에 두고, 길 위에서 함께 달리고 있는 거야. 글을 잘 쓰려면 일단 쓰고, 고쳐 쓰고, 끝까지 쓰라잖아. 이 편지도 그렇게 쓰이고 있어. 오래달리기도, 기술을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야. 일단 해보자. 넘어져도 다시 해보는 거야. 그러고 나면 끝내 완주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 발아래 길이 불확실할 때마다 이 편지가 이정표가 되어주기를 바랄게. 갈수록 세상은 복잡해지겠지만, 너의 길은 또렷해. 주저하지 말고 계속 걸어가. 지금의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고, 앞으로의 나는, 네 걸음 끝에 서 있을 거야. 2035년, 소리로 길을 읽는 너의 길벗으로부터